
[더팩트ㅣ장병문 기자] 지난 2014년 싼타페 운전자 A 씨가 고가의 수입차 벤틀리를 상대로 자기과실 100%의 사고를 냈다. 벤틀리의 차 값은 약 3억 원대로 수리비가 1억5000만 원에 달했다. 여기에 동종 차량을 빌리는 렌트 비용은 하루 150만 원으로 30일 동안 4500만 원이 청구됐다. A 씨는 1억9500만 원을 물어야 했는데 대물 배상이 최대 1억 원인 보험을 들어서 추가로 9500만 원을 내야 했다. A 씨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최근 신차 값 2000여만 원의 국산차를 모는 B 씨는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와 충돌했다. 보험사 조사 결과 B 씨의 과실이 30%, 벤츠 운전자의 과실은 70%로 정해졌다. B 씨의 차의 수리비는 100만 원, 벤츠는 600만 원의 수리비가 나왔다. 총 수리비 700만 원을 과실 비율로 나누면 A 씨는 210만 원, 벤츠 운전자는 490만 원 부담해야 한다. 과실이 적은 A 씨가 자신의 차 수리비의 두 배가 넘는 돈을 보험으로 처리해야 했다.
이 사고들은 수입차의 비싼 수리비와 렌트비가 서민들의 고충을 높이고 보험료를 끌어올리는 사례다. 일각에서는 서민들에게 받은 보험료를 부자들의 자동차 수리비로 쓴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고가 수입차에 대한 자동차 보험에 대해 칼을 빼 들었고, 내달 1일 바뀌는 자동차보험 개정안이 실행된다. 자동차보험 표준약관 개정안에 따르면 사고 피해에 따른 대차 지급 기준은 현행 배기량과 연식이 유사한 동종 차량에서 '동급 최저' 차량으로 바뀐다. 또 사고 시점부터 최대 30일간 렌트할 수 있었지만, 수리업체에 맡긴 기간만 렌터카를 이용할 수 있다.
렌트비로 꼼수를 부리는 사람들을 막는 대책으로는 환영할 만하지만 정작 비싼 수입차 수리비의 진짜 원인인 부품값에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입차의 고가 수리비의 경우, 현재 외제차를 독점 수입하는 업체들이 마음대로 부품값을 정해 과도한 거품이 끼고 있다는 게 업계내 지적이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순정부품을 대체하는 부품 유통과 병행 수입을 활성화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부문에서 정부의 노력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수입차 드라이버들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제차의 불합리한 수리·렌트 관행을 고친다는 취지는 좋지만 고가의 수입차라고 해서 무턱대고 불이익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억1900만 원짜리 BMW5 M(배기량 3000cc) 차량을 몰다 사고가 나면 유사한 배기량과 연식의 국산차가 렌트된다. 국산 준대형차인 그랜저나 K7을 받게 된다. 배기량은 비슷하겠지만 차 값과 성능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배기량 3000cc의 그랜저의 경우 3259만에서 3838만 원으로 BMW5 M과 3~4배가량 차이가 난다.
개정안은 대차 기준을 유사한 배기량과 연식의 국산차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업계에서는 다운사이징 엔진이 보편화 되면서 배기량은 더이상 차급을 결정하는 요소로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당국은 새겨들어야 한다. 자동차 기술 발전에 발맞춰 보험정책도 탄력적으로 진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올해 1월 국내 시장에 나온 재규어 뉴 XJ는 재규어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세단이지만 다운사이징 터보 엔진을 적용한 배기량 2000cc 모델이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다. 이 모델은 중형차급의 배기량을 갖추고도 3000cc 자연흡기 차량에 맞먹는 성능을 낸다. 그동안 배기량 2500cc, 3500cc 자연흡기 엔진을 쓰던 렉서스는 다운사이징된 4기통 2000cc 터보차저 엔진을 도입해 엔트리 세단 IS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수입차 브랜드뿐만 아니라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다운사이징 엔진을 탑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르노삼성의 주력 모델인 SM6는 준대형급에 맞먹는 차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1600cc 가솔린 터보 엔진으로 달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중형차인 현대 쏘나타도 1600cc 다운사이징 엔진을 적용한 모델이 출시됐다. 또 상반기에 출시될 예정인 한국지엠의 말리부도 기존 배기량 2000cc 엔진을 내려놓고 1500cc 터보 엔진으로 출격 준비를 앞두고 있다.
SM6 1.6이나 쏘나타 1.6 차량을 보유한 운전자들도 이번 개정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고가 날 경우 배기량 기준으로 SM3나 아반떼를 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서도 배기량 기준의 자동차 세금을 폐지하고 차 값 기준으로 변경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자동차의 기술 발전과 시장의 변화로 차급을 배기량으로 삼는 것은 오래된 발상이다. 자동차보험이 여전히 배기량으로만 차급을 나누는 것이 합리적인 기준인지 당국과 보험업계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나치게 비싼 수입차 수리비와 렌트비를 우선 해결하지 않고 보험 가입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고가의 수입차로부터 국산차 운전자를 보호하는 정책은 두 팔 벌려 환영하지만 이번 자동차보험 개정안이 국산차 운전자와 수입차 운전자가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한 법안이 아니라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양측 입맛을 다 맞추는 게 어렵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