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소통에도 균형감 필요…올 추석 대목에는 호남 재래시장도 찾아주시기를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 첫날인 지난 5일 경남 통영 중앙시장을 방문, 생선 상인과 대화하고 있다. /더팩트 DB |
[더팩트 ㅣ 광주=박호재 기자] '미복잠행'은 군주가 민생을 살피기 위해 평상복 차림으로 다니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암행'이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행동임에 비해 '잠행'은 특정한 목표 없이 민생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옛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의 왕들이 곧잘 미복잠행을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성을 축조하는 일에 진심이어서 성을 쌓는 동안 남산에 올라 성터를 보기도 하고 내친김에 미복잠행을 하고 성의 축조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숙종, 영조, 정조도 잠행에 나서곤 했다. 이 잠행을 통해 군주들은 신하가 알려주지 않는 백성들의 고충을 살피고 이를 국정운영에 참고했다. 때로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물론 사학자들은 이 미복잠행을 꼭 긍정적인 시선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태종실록에 남아있는 양녕대군의 잠행은 음주가무와 여자를 취하기 위한 목적이 태반이었다. 연산군의 잠행 또한 잔치와 사냥을 위한 사적인 목적이었다고 쓰여 있다.
미디어의 발달로 권력자의 얼굴을 숨길 수가 없는 시대가 되며 미복잠행의 통치행위는 사라졌다. 대신에 공개 행보를 통한 '민심 청취' 또는 '민생 탐방'이라는 국민들과의 소통 과정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재래시장 방문은 윤석열 대통령의 민생 탐방 단골 메뉴다. 이번 여름 휴가 기간에도 윤 대통령은 시간을 쪼개 통영 중앙시장을 찾았다. 특히 윤 대통령의 재래시장에 대한 관심은 남달라 보인다. 지난해 7월 폴란드 공식 방문 기간에도 바르샤바의 미로부스카 재래시장을 방문했을 정도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집권 후에도 어김없이 전통 재래시장을 즐겨 찾곤 했다. 문제는 방문지가 수도권과 중부권, 그리고 영남에 쏠려있다는 점이다. 특히 부산 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방문이 잦았다. 그때마다 노후시설 보수와 시장 활성화에 관련된 약속을 했던 터라 호남의 재래시장 상인들은 '왜 이곳은 찾지 않느냐'고 불만을 품을 듯도 싶다.
영남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 열기가 뜨거운 곳이다. 집권 여당도 영남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이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대하는 곳만 찾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국민 삶 현장의 진솔한 목소리를 두루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의 변함없는 지지 열기를 확인하고, 그곳에서 위로받고 에너지를 얻기 위한 행보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의 벽 안에 갇힌 채 장기화하며 회복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상식대로라면 윤 대통령은 나머지 부정적인 지지율의 내막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지지율 확장 없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얻기는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의 호남 지지율은 열악한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호남 재래시장 방문은 윤 대통령으로선 심정적으로 달갑잖은 행보일 수 있다. 환대보다는 쓴소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이다. 재래시장 방문이 사적인 목적이 아닌, 국정 운영과 정국 구상의 지혜를 얻기 위한 행보라면 이 또한 균형감을 갖춰야 할 일이다. 영남 재래시장에 쏠려있는 민생 탐방은 국정 운영을 위한 지혜를 구하는 차원에서 반쪽짜리 기능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 추석에는 윤 대통령이 호남의 재래시장을 방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