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시장 안정, PF 부실 건설사 지원에 '수십조원' 투입
정부와 시장의 실패로 발생한 서민들의 '사회 문제'는 외면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와 전세사기 시민사회대책위 회원들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즉각 공포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새롬 기자 |
[더팩트ㅣ최지혜 기자] 전세사기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담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로 폐기됐다. 제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 거부권이 행사된 만큼 재의결 투표도 불가능했다. 특별법을 밀어붙인 야당은 22대 국회가 열리면 개정안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전세사기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전세사기에 대한 박 장관의 태도는 다소 일관적이다. 전세사기는 '개인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로, 그 피해 구제에 나랏돈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피해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박 장관은 전날 전세사기 피해와 보이스피싱, 다단계판매 등 다른 사기 피해를 견주며 전세사기특별법이 평등하지 않다는 주장도 펼쳤다. 특히 "사인 간 계약에 따른 사기 피해자를 국가가 공공의 자금으로 직접 구제하는 전례 없는 법률안"이라고 했다.
또 이달 진행된 차담회에서 박 장관은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며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국토부는 과거 전세 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으나 그다지 설득력을 얻지는 못했다.
선구제 후회수 방안이 시행될 경우 투입되는 비용 규모와 관련해서도 정부와 피해자의 추정치 차이가 크다. 국토부는 내년 5월까지 전세사기 피해자 수가 3만6000명 규모로 늘어날 경우 피해자 선구제에 약 5조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하지만, 피해자단체는 5000억원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한덕수 총리도 가세해 "법이 시행되면 임차보증금반환채권 매입에 수조원의 주택도시기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투입된 비용의 상당액은 회수도 불투명해 기금 부실화가 우려된다"고 특별법 국회 통과를 비판했다.
이같은 정부의 태도에는 전세사기가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결여된 측면이 있다. 수많은 청년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는 전세사기는 '정부 실패'와 '시장 실패'로 발생한 사회 문제다. 금융기관은 보증금 반환을 감당할 수 없는 개인이 수백채의 집을 보유했는데도 대출을 내줬다. 철저한 정부의 시장 관리하에선 발생할 수 없는 기형적 상황이다. 이로 인해 특별법 제정 1년 만에 피해자가 1만7000명을 넘어섰고, 이 가운데 8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히 적극적으로 비용을 투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의아하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명목으로 지난해 운영한 특례보금자리론으로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부채는 1년 만에 11조3000억원(62%) 급증했다. 올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경색 완화를 위해 기업에 지원하는 공적자금은 25조원 규모다.
시장 안정화와 기업에 금융을 지원하는 것에는 조 단위, 수십조 단위의 재정을 투입하면서, 정부와 시장의 실패로 피해를 당한 서민들에게는 주머니를 아끼려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피해자들은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공포를 요구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와 전세사기 시민사회대책위 회원들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앞두고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비정하고 잔인할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 선구제 방안이 마련되더라도 정부가 이미 마련한 선택지를 고르는 피해자들도 나올 수 있는 만큼 정부의 재정적 부담이 크지 않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사회적 문제의 정쟁화는 효율적인 피해 구제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불가피하게 22대 국회로 넘어갈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표류를 하루빨리 끝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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