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근의 영화 속 도시이야기]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 트빌리시(Tbilisi)
입력: 2024.05.27 08:27 / 수정: 2024.05.27 08:27

CIS 탈퇴 후 조지아로 국호 변경…최근 다시 친러 회귀 가능성
영화 촬영으로 봉쇄됐던 거리 이제는 반정부 시위 상징으로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영화 포스터./IMDb.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영화 포스터./IMDb.

[더팩트ㅣ대구=김승근 기자] 1991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됐다. 이후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은 신생 국가로서 저마다의 색깔로 세계의 일원이 돼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독립국가연합(CIS) 즉 소련 붕괴로 인해 독립국가가 되면서 만들어진 옛 소련 공화국 연합체에 속한 국가들이 가장 많다. 15개 옛 소련 구성 국가 중 8개가 정회원국이다. 친러 체제가 강력하게 구축된 벨라루스가 여기에 포함돼 있다.

발트3국이나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처럼 옛 소련의 그늘을 지우고 현재의 러시아와 일정 거리를 두려는 나라들도 있다.

이 시간에도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나라들도 있다. CIS 소속이지만 사실상 반러 행보를 지속해오면서 최근 EU가입을 추진 중인 몰도바가 그 케이스다. 그러나 지난해 지방선거 참패로 자국 내 친러 세력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세가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69년의 옛 소련 체제 아래 그들의 일부로 존속돼 왔지만 각 국가의 성격이나 지향하는 정치 시스템은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촬영 장소인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루스타밸리거리./IMDb.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촬영 장소인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루스타밸리거리./IMDb.

그렇다면 조지아(Georgia)는 이들 그룹 중 어디에 속할까.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함께 코카서스 3국에 속한 조지아는 원래 CIS 국가였지만 2009년 탈퇴한 후 대표적 친미 국가가 됐다.

미국 동남부의 주 이름과 같은 조지아는 원래 조지아가 아니라 그루지아였다. 2005년 국가 이름을 영어식인 조지아로 바꿨다.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향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물론 아직도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은 조지아를 그루지아로 부른다.

그 나라가 지향하는 체제 방향성에 따라 국호가 바뀐다는 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어쩌면 조지아란 이름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최근 조지아의 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에서는 지난 14일 3번째이자 마지막 국회 독회(심의)에서 몇 주간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분열적인 법안을 승인했다. 전문가들은 이 법안을 민주적 자유와 EU에 가입하려는 국가의 열망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 이 법안은 언론과 NGO, 기타 비영리단체가 해외로부터 자금의 20% 이상을 받으면 '외국 세력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등록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야당에서 ‘러시아 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러시아가 정부에 비판적인 미디어, NGO, 운동가들을 단속하기 위해 유사 법안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법안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수도 트빌리시의 중심 루스타밸리거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Fast & Furious 9 THE FAST SAGA)’ (2021년) 촬영으로 인해 2019년 8월 한때 봉쇄돼 눈길을 끌었던 곳이 바로 이 루스타벨리거리다.

블록버스터 촬영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던 중앙대로가 이제는 수업 참여를 거부하고 학교 밖으로 나온 학생들과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경찰의 대치현장이 된 것이다.

조지아의 어머니상에서 내려다 본 트빌리시 전경. 가운데 유리로 된 곳이 평화의 다리이고 오른쪽 병모양 건물이 있는 곳이 리케공원이다./대구=김승근 기자
'조지아의 어머니상'에서 내려다 본 트빌리시 전경. 가운데 유리로 된 곳이 평화의 다리이고 오른쪽 병모양 건물이 있는 곳이 리케공원이다./대구=김승근 기자

다른 어느 수도보다 트빌리시공항에 뜨고 내리는 새벽 비행기가 많은 신생국가 조지아의 역동성이 위축되지나 않을지 우려스럽다. 슈퍼마켓은 물론 약국, 은행까지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아 다소 생경한 인상을 주는 트빌리시는 서울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인구는 10분의 1 수준인 124만 명이 살고 있다.

도시 중심은 걸어 다녀도 될 정도로 크지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독특한 문자로 적힌 간판들이다. 모음 5개와 자음 28개로 구성된 조지아 알파벳의 동글동글한 형태가 마치 그림같다.

동글동글한 조지아 글자로 써진 가게 간판./대구=김승근 기자
동글동글한 조지아 글자로 써진 가게 간판./대구=김승근 기자

간판만큼이나 독특한 건축물들도 많다.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의 트빌리시 자막이 나오는 사진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건물도 그 중 하나다.

흡사 '젠가' 같이 보이는 이 건물은 옛 소련 시대에 유행했던 잔혹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구조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옛 자동차 도로부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조지아 은행 본부로 사용된다.

일반인이 건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건축물은 외부에서 봐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면 건축물 앞을 흐르는 쿠라강 너머가 좋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의 트빌리시 도입부 장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젠가 같은 건물이 조지아은행본부로 잔혹주의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IMDb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의 트빌리시 도입부 장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젠가 같은 건물이 조지아은행본부로 잔혹주의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IMDb

펑화의 다리 역시 트빌리시의 상징적 건축물 중 하나다. 보행자 전용 다리이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병모양 건축물이 있는 평화의 다리 옆 리케공원에서 트빌리시의 상징인 ‘조지아의 어머니상’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물론 걸어서 올라가도 20분이 채 안 걸린다.

조지아의 어머니상은 1958년 만들어진 20m 높이의 조각상으로 왼쪽에는 와인잔, 오른쪽에는 검을 들고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주지만 적에게는 무기로 응징한다는 의미다. 이곳에서 트빌리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낮에도 좋지만 야경도 아름답다. 잘 알려지지 않아 여행객은 찾지 않지만 ‘조지아의 어머니상’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시가지 높은 언덕에 위치한 수도원과 공동묘지 옆 작은 공원에서도 트빌리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트빌리시의 거리 서점. 서점이라고 해봐야 건물 창틀이나 지하도 계단 옆에 중고서적을 놓고 파는 게 전부지만 그 주위에 책을 읽는 시민들의 열정은 큰 서점 못지않다./대구=김승근 기자
트빌리시의 거리 서점. 서점이라고 해봐야 건물 창틀이나 지하도 계단 옆에 중고서적을 놓고 파는 게 전부지만 그 주위에 책을 읽는 시민들의 열정은 큰 서점 못지않다./대구=김승근 기자

건축물보다 더 인상적인 건 건물 담벼락 아래에 군데군데 있는 길거리 중고책서점이다. 과거 동유럽 공산권 국가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기는 하지만 트빌리시는 길거리서점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 책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 아무 곳이나 앉아 진지하게 책을 보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한편 지난 23일 미국은 조지아의 친러정책 선회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새로운 비자 제한을 도입하고 양국 협력관계의 포괄적 재검토를 시작하겠다고 밝혀 조지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미국의 이번 조치가 조지아 국민이 원하는 미래로 가는데 긍정적 방향으로 작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tktf@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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