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색깔론 씌워 호남 고립 정략 아닌지 ‘의구심’
낡은 이념정쟁으로 국민들 편 갈라선 안돼
자유통일당원들이 28일 오후 광 주 남구 양림동 정율성 동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율성 공원 조성 철회 구호를 외치고 있다./광주=뉴시스 |
[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1979년,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이 계관 지휘자로 있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국에 왔었다. 세계 굴지의 오케스트라의 첫 방한 공연이었기에 클래식 애호가들이 열광했지만, 하마터면 공연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레퍼토리 중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 곡은 볼세비키 혁명 이후 냉혹한 스탈린 체제 아래서 부르조아적 음악을 한다는 당의 신랄한 비판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쇼스타코비치가 사회주의 찬양의 주제를 담아 발표한 교향곡이었다.
반공을 체제유지를 위한 국시로 활용했던 당시 정부는 레퍼토리 교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예술에 이념과 정치가 개입되는 그런 나라에서는 연주할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쳐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지금 문득 그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더구나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똑같은 사례가 발생한다면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낡은 냉전체제의 해프닝 같은 일화를 작금에 대비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고 헛웃음을 치는 이들이 많겠지만, 이에 온전히 동조할 수 없는 현실이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광주 출신 중국의 혁명음악가 정율성 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광주시를 향해 국민의힘과 일부 극우 사회단체들, 그리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날을 세우고 있다. 적성국가에 부역했던 예술가를 기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발이다. 이들의 비판 속에 항일투쟁 의열단의 열렬한 전사였으며, 그의 일가 모두가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정율성의 혁혁한 발자취는 종적을 감추고 있다.
갑자기 고개를 쳐든 극우 단체들의 총질은 광주시의 정율성 사업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항일 독립운동사 자체를 깡그리 전복하려는 듯 전 방위적이다. 육군 사관학교 캠퍼스에 있던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등 항일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을 이전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파란이 일고 있다.
광복회를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 보수진영의 원로이기도 한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5인의 독립유공자 흉상을 국방부가 합당한 이유 없이 철거를 시도한 것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들어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고 규탄했다.
이들 독립영웅들의 흉상 제막식은 2018년 3월 1일 정부 주도로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또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난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훈장이 추서된 인물들이다. 보수정권인 박근혜 정권 때 우리 해군의 잠수함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진영을 떠나 국민적 합의에 이른 역사정립의 결실인 것이다.
어느날 아침 문득 눈을 뜨니 나라가 냉전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린 꼴이다.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낡은 ’냉전체제의 망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셈이다.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예기치 못한 풍경은,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전면에 드러낸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협정에서 드러난 신냉전체제 구축의 후폭풍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권에 따라 외교적 기조는 바뀔 수 있지만 임기가 유한한 정권의 이념잣대로 독립투쟁의 가치로 정립된 역사의 기조가 전복돼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 헌법적 처사"라는 독립운동기념 단체들의 반발이 설득력 있게 다가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율성 공원사업을 추진 중인 강기정 시장은 극우 세력들의 방해를 "냉전 30년이 지났지만 철지난 이념공세가 광주를 향하고 있다"고 개탄하며 "그래도 광주정신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광주시 5개구 구청장협의회도 "현재의 시대적 가치를 기준으로 그의 생애 중 한 면만을 부각시켜 정체성을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정율성 역사공원이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밝혔다.
광주 시민공동체의 합의로 추진 중인 사업을 ’냉전 메카시즘‘의 잣대로 흔들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정권 안위를 위해 색깔론으로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략은 아닌지 의문의 눈길을 던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앞세워 무모한 이념의 폐해를 비판해왔던 윤석열 정부가 나라를 새삼 이념의 정쟁으로 편 가르는 두 얼굴을 기자는 납득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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