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광주 학살 죄인’ 엎드려 사과…한 청년의 ‘고뇌어린 결단’으로 껴안아야 할 듯
31일 국립5.18민주묘역을 참배한 전우원씨가 유족 김길자 씨의 당부의 말을 들으며 포옹하고 있다./광주=나윤상 기자 |
[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광주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가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하겠다며 29일 광주를 찾았다. 80년 광주학살 주범, 증오의 인물로 각인된 고인의 손자가 ‘사죄하고 싶다’며 불쑥 광주를 찾았으니 시민들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30일 하루 휴식을 취한 그는 다음 날 5‧18 피해자들과 대면하는 공개 기자회견, 그리고 희생자 묘지를 찾는 일정을 소화했다. 5‧18 주요 단체들은 일단 뉴욕에서 광주까지 사죄의 길을 달려온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전우원 씨는 고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의 아들이다. 미국에 체류하던 전 씨는 지난 3월 13일부터 유튜브 등을 통해 전씨 일가의 비자금 의혹 등을 폭로하고 본인의 마약 투여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세인들은 약물로 의식이 피폐해진 한 청년의 일탈로 여겼던 게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조차 아들을 심신미약의 상태로 언론에 전했다.
그러나 이후 전씨의 행보는 차츰 실감 있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마약 상용 범죄를 자백하고, 전두환 비자금이라 알려진 가족들의 검은 돈 운용 실태를 폭로했다.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며 동료들로부터 광주의 상처와 한을 알게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느낄 수도 있는 전우원의 행적을 보며 독재자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삶이 문득 겹쳐온다. 스탈린이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스페틀라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진영의 평가가 극한으로 엇갈린 아버지의 가족사에 갇혀 평생을 방황하다 미국의 한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탈린 사후 그녀는 아버지를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평가했다. 또한 회고록을 통해 수백만명을 노동 수용소에 보냈다며 스탈린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격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오직 그녀 앞에서만 마음을 풀었다는 아버지 스탈린을 향해 모멸차게 선을 그었으니 ‘슬픈 각성’이라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스베틀라나의 전기에 얽힌 기사들을 보면 아버지 스탈린과의 단란한 시절을 담은 흑백사진이 함께 등장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악의 평범성’을 연상케 하는 그 사진을 보며, 어린 두 손자들을 양 팔에 껴안고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전두환의 사진(전우원 인스타그램)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전우원이 뉴욕에서 광주에 이르는 여정에 자신의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폭로한 전씨 일가의 비리는 이제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됐다. 그동안 세인들의 입살에 오르내린 전두환 비자금 수사도 비켜갈 수 없는 상황이다.
사법정의의 영역을 떠나 전우원씨의 광주 사죄방문은 시민사회에 의미심장하게 다가섰다. 그의 사과가 살아 생전 반성 한마디 없었던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과와 결코 환치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 할아버지는 광주학살 죄인이며, 저 또한 죄인이다"며 울먹이며 엎드려 사죄했고, 그의 사죄의 모습을 지켜본 유족들과 피해자들 또한 눈물을 훔쳤다. 국립5‧18민주묘역에서 그의 참배를 지켜본 시민들 또한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가족의 죄상을 발가벗겨놓아야 했기에, 많이 고통스러웠을 그의 ‘슬픈 각성’을 이제 광주인들 또한 한 청년의 ‘고뇌어린 결단’으로 껴안아야 할 듯싶다.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국가폭력을 참혹하게 겪었다. 가해 집단의 사과는커녕 정권의 부침에 따라 진영의 아집에 얽매여 피해자들을 거듭 할퀴는 폄훼와 역사 왜곡도 반복되고 있다. 광주 5‧18도 제주 4‧3도 그렇게 해원의 길에 여전히 이르지 못하고 있다.
역사정의에 대한 올바른 가치판단과 가해 집단의 사과 없는 화유는 없다. 전우원의 ‘광주 사과’가 특별히 우리에게 와 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2‧제3의 전우원이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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