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예산, '방탄'이나 국정조사를 위한 정략적 도구 아니다
처리 늦어지면 내년 ‘예산 참사’우려...여야 빠른 합의가 정답
8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오른쪽)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남윤호 기자 |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앙숙인 2명의 목동이 함께 각각의 양을 잃어버렸다. 한 사람은 책을 읽다가, 다른 이는 장기놀이를 하다 그랬다고 한다. 장기놀이를 한 이보다 독서를 한 사람이 명분이 더 있고 훌륭하다고 우길수 있을까? 아니다. 각자 한 일의 가치는 달랐지만 양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주어진 본연의 일을 소홀히 처리했다면 예나 지금이나 정신을 팔았던 일이 무엇이든 비난이 받아도 할말이 없으리라 본다. 그건 사심이나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장자(莊子) 병무편(騈拇篇)을 넘기다보면 이같은 독서망양(讀書亡羊)의 사례를 경계한다. 당면한 일이고 본인을 위하고 나아가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어떤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면 본연의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최근 예산 국회가 그렇다. 짙어지는 경기 악화로 여느때보다 내년도 예산안 처리가 시급한데 여야의 힘겨루기로 요원해 보인다, 법정 시한을 넘긴 지 일주일째다. 현재로서는 ‘준예산’ 편성 가능성이 높다. 준예산이 현실화하면 헌정 사상 최초가 된다. 최소한의 예산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만큼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주요 사업들은 좌초될 가능성이 높다.
‘준예산’은 올해 회계연도 마지막 날(12월31일)까지 처리되지 못했을 때 전년도 예산에 준해 집행하는 잠정 예산을 말한다. 다만 준예산은 집행이 제한적이다. 정부기능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관리비와 인건비만 지출할 수 있다. 신규 사업은 물론 사회간접자본(SOC), 노인 일자리, 신설되는 부모급여나 지급단가가 인상된 복지관련 재량 지출이 막히게 된다.
광역지자체는 중앙정부 예산안이 확정 이후인 12월 17일에 예산을 확정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기초지자체는 광역지자체 예산 확정 이후 12월 22일에 예산을 확정한다. 따라서 중앙정부 예산안이 확정되지 않으면, 이후 지자체 예산 심의에는 막대한 지장이 생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남윤호 기자 |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6일부터 담판 협상을 이어왔지만 난망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실 이전 등 ‘윤석열표’ 예산을 깎으려 하고, 국민의힘은 지키려 줄다리기만 이어간다. 여당이 추진하는 금융투자소득세 과세 유예 등 감세안, 민주당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혹은 탄핵소추안)도 쟁점이다.
여야는 구체적 협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사업 예산(70억원)과 민주당이 추진하는 신재생에너지 예산(정부안 4173억원+1668억원)을 원안대로 살리는 쪽으로 사실상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지는 등 합의과정에 진전은 있어 보인다. 대표적인 윤석열표 예산인 용산 대통령실과 경찰국 신설 예산과 이재명표 예산인 지역사랑 상품권 예산은 합의점을 못 찾고 있다. ‘국민을 위한 예산’이 먼저 인데도 말이다.
국회는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후 지난해까지 8년 동안 5차례 예산안 법정처리시한(12월2일)을 지켰다. 올해처럼 법정처리시한을 어긴 것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인데, 그때도 12월9일이나 10일까지인 정기국회 기간을 넘기지 않았다.
여야는 9일까지인 정기국회 회기 내 예산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이견이 없다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후 처음으로 정기국회 기간 내에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사례로 오명을 남길 수 있다. 양당의 사심이 충돌한 ‘예산 참사’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윤석열표 예산’, ‘이재명표 예산’에 대한 신경전에 ‘이태원 참사’ 대응 및 수습과 관련 합의된 국정조사 실시와 이상민 장관의 거취 문제까지 여기에 맞물려 있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데는 민주당의 책임이 커 보인다. 169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예산안 수정안을 내 단독 처리할 수도 있는 반면 소수 여당인 국민의힘은 민주당과의 합의 외에 뾰족한 돌파구가 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및 코로나19 중대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이 장관은 민주당으로부터 이태원 참사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동률 기자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방탄’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불시에 이 대표 소환, 체포 영장 등 검찰의 조치에 대응하려면 국회가 열려 있어야 대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독서망양’이 아닌 ‘사심망양’은 민주당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민생’을 부르짖는 공당으로서 낯 뜨거운 행태다. 민주당은 7일 오는 10일부터 다시 임시국회 소집을 위한 소집요구서를 국회 사무처에 제출한 점도 다소 수상쩍다. 공세적인데 오히려 다급해보이는 일면도 있다. 국민의힘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9일까지 예산안 처리를 마무리 짓겠다는 입장이다. 여당인데 상대적으로 느긋해보여서 얄밉다.
앞서 민주당은 이번 예산 국회에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예산소위) 등에서 윤석열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대대적인 삭감을 추진했다. 특히 국토교통위원회의 공공임대주택과 공공분양주택 예산, 운영위원회의 대통령실 이전 예산, 정무위원회의 보훈처 예산 등을 삭감하며 여당과 갈등을 빚었다.합의가 안되면 자체 단독 예산안 처리도 불사하겠다는 엄포도 놨다.
물론 헌법상 국회는 정부의 예산안을 수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정부는 증액동의권을 가지는 만큼 민주당 자체의 단독 예산안 처리가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예산을 삭감한 예산안에 대해서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가 예산명세서를 작성할 명분이나 의무가 없다. 야당이 자체 안을 내놓아도 기획재정부 예산실이 나서지 않으면 어렵다.
국민이 바라는 바는 ‘윤석열 예산’이나 ‘이재명 예산’이 아닌 ‘국민을 위한 예산’ 확보이다. 물론 정당이 적절한 예산국회 대응으로도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정당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다. 국민의 지지를 얻는 주도권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값지다. '예산도 정치' 이지만 당의 입장에 따라 좋은 예산과 나쁜 예산이 나누고 정략적으로악용한다면 국민의 지지를 바라는 올바른 공당과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