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 합의, 잉크도 안 말랐는데 재논의?
국민의힘은 25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과 관련한 박병석 국회의장 중재안 수용을 불과 사흘 만에 재논의하기로 했다. 사진은 이날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는 이준석 대표(왼쪽)와 권성동 원내대표. /이선화 기자 |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늑대가 나타났다!" 마을 주민들은 양치기 소년의 고함에 무기를 들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이후 주민들은 양치기 소년이 여러 차례 같은 장난을 하자 믿지 않게 됐다. 소년은 진짜 늑대가 나타나자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지만, 마을 사람들 누구도 믿지 않았다. 끝내 소년의 양들은 모두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솝 우화 '양치기 소년' 이야기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계속하면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진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런 일들은 일상에서 비슷한 일들을 숱하게 겪는다. 특히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많은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게 유사하다. 유권자인 국민은 표로서 정치인들에게 신뢰를 보내지만, 약속은 생각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약속은 선거철에만 유효한 경우가 허다하다. 양치기 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면서도 국민은 또 속아주곤 한다. 일종의 기대감이다.
최근에도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는 상황을 보고 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두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박병석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과 한 약속을 사흘 만에 깨고 재논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장 정치권의 야합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합의의 균열은 지난 24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지적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저는 당 대표로서 항상 원내지도부의 논의를 존중해왔고, 소위 검수완박 논의가 우리 당의 의원총회에서 통과했다고는 하지만, 심각한 모순점들이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입법추진은 무리"라며 "1주일로 시한을 정해 움직일 사안이 아니다"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재논의하겠다고 했다.
이 대표가 공언한 대로 25일 국민의힘은 최고위에서 재논의 필요성을 공식화했다. 민주당과 합의했던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공직자 범죄와 선거 범죄에 대한 검찰의 직접수사권이 빠진 부분에 대해서 국민의 지적이 많이 있다"며 "선거 범죄, 공직자 범죄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지적과 뜻이 모일 수 있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서 재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박 의장 중재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지난 22일 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왼쪽),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검수완박' 법안 관련 국회의장 중재안에 합의한 후 합의문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국회사진취재단 |
불과 사흘 전 권 원내대표는 박 의장 중재안에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와 합의문에 서명한 후 "결국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은 국민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국민 이익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며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부여한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권 원내대표가 박 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한다고 밝혔을 당시, 취재진 사이에서는 '그렇게 안 된다더니 이걸 수용한다고?'라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권 원내대표는 합의문 서명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었다.
원내대표가 된 이후 첫 여야 합의를 이끈 권 원내대표는 본인 입으로 말했던 "국민 이익"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왜 내팽개쳤을까. 그 배경은 무엇일까. 단순히 이 대표의 문제제기 때문일까.
'검수완박' 재논의가 언급된 이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대표는 재논의 공식발언 이전 한 후보자와 통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후보자는 검수완박 법안과 관련해 "급하게 추가 입법이 되면 문제점들이 심각하게 악화될 것"으로 우려를 계속 드러냈다.
윤 당선인 역시 마찬가지다. 윤 당선인의 측근인 장제원 비서실장은 25일 "'검수완박은 부패완판' '법안 통과는 헌법정신을 크게 위배하는 것'이라는 검찰총장 사퇴 당시 말씀과 생각에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장 비서실장의 발언 등을 볼 때 국민의힘이 박 의장 중재안에 합의했다가 재논의로 입장을 선회한 것은 지지층의 비판도 있었겠지만, 결국엔 대통령 당선인의 의중에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당을 대표하는 원내대표가 당선인의 의중을 뒤늦게 파악하고, 부랴부랴 국민과의 약속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뒤집었다.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미래 여당이라면 국민의 신뢰를 담보하기는 어렵다. 국민보다 당선인의 의중을 먼저 생각하는 여당의 모습은 이미 질리도록 봐온 국민이다. 이번엔 달라질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며, 정작 달라지지 않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는 국민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언제까지 '양치기 정치'를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