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부친의 세종시 논 구입 과정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해명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선화 기자 |
여야, 유·불리 정치적 셈법에만 매몰...고스톱판 수준을 못 넘는 정치 현실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제하분주 (濟河焚舟), 황하를 건넌 뒤 배를 불사른다는 이 성어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가기를 기약하지 않는 굳은 의지나 각오를 나타낸다. 공자(孔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春秋)의 주석서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등장한다. 진(秦) 목공(穆公)이 진(晉)나라 정벌에 나서는 과정에서 유래했다.
황하를 건너자 타고 간 배를 불에 태우고 진(晉)을 공격한다. 하지만 진(晉)의 군대는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키기만 했다.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나의 사퇴서를 처리하라"며 지난달 25일 제출한 사직안에 대한 여야의 움직임은 성만 지키는 진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야 간의 공방만 무성했지 8월 처리는 결국 무산됐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를 우선시 하며 안건으로 올리지 않았다. 1일 정기국회가 열렸지만 여야는 윤의원 거취와 관련, 말의 성찬(盛饌)만 이어가고 있다.
국민의 힘은 윤 의원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추가 의혹이 일부 제기된 데다 정치 쟁점화가 가져올 손익 계산이 불분명하자 유체이탈 화법에 가까운 어조로 더불어민주당에 공을 떠넘기기 여념이 없다. 민주당은 '사퇴보다 수사가 먼저'라고 받아친 뒤 여야 공동 처리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정쩡한 자세다.
국회법 제134조는 "국회는 의결로 의원의 사직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박 의장이 100일 간의 정기국회 기간 중 만약 윤 의원의 사퇴안을 상정한다면 단순 표결로 처리된다.
여야는 사직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말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즉, '뜨거운 감자'라는 얘기도 나온다. 얄팍한 유·불리 계산에 속내가 드러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윤 의원의 정면 돌파 선언이 영 마뜩잖다.
이러한 여야의 입장은 상호확증파괴(相互確證破壞)까지 연상시킨다. 20세기 냉전체제 당시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이 제안하여 만들어진 용어다. 공격국이 선제 핵공격을 해도 방어국이 이에 맞서 보복 핵공격을 할 수 있을 때는 공격 측과 방어 측 모두가 파괴되는 상황이 발생할수 있어 섣불리 선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농지법 위반 의혹이 제기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의 '부친이 매입한 세종시 토지'의 위치를 공개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
국회 상황도 어느 한쪽이 윤의원 사직안을 선제적 처리에 나설 경우 여야 모두 2차 타격 능력, 이른바 상대방 뇌관을 건드릴 수 있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가능성이 적지 않다. 여야 모두 권익위 발 부동산 투기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나머지 여야 부동산 위법 의혹 의원들은 어쩔래?’라는 비난과 자칫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 윤 의원의 사퇴처리가 불편한 지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윤 의원은 2차 기자회견에서 산업단지 예비타당성 조사 정보를 빼돌렸다는 의혹을 제기한 민주당의 우원식 김용민 김남국 김영배 전재수 장경태 양이원영 신현영 민형배 한준호 의원 등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거론하며 "평생 공작 정치나 일삼으며 입으로만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모리배들의 자기고백"이라고 몰아세웠다. 이 불똥은 유력 여권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에까지 튄 상태다.
특히 이재명 캠프를 겨냥, 선거대책위원장인 우원식 의원, 수행실장인 김남국 의원, 남영희 대변인이 음해에 가장 앞장선 것을 비난했다. ‘이 모의의 꼭대기엔 캠프의 우두머리 이재명 후보가 있고 만약 자신이 무혐의로 결론나면, 이재명 후보 당신도 당장 사퇴하고 정치를 떠나라’고 칼날을 겨눈 것이다.
정의당이 거대 양당을 맹렬히 비판한 지점도 무관치 않다. 이동영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윤희숙 의원 사퇴안 처리에 대한 당론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며, 투기의혹을 받고 있는 자당 소속 의원에 대한 엄정 징계 약속부터 철저히 이행해야 할 것"이라고 퍼부었다.
이 수석대변인은 "국민의힘은 권익위 조사 결과에 따른 투기의혹 대상의원들에게 셀프 면죄부를 준 것부터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당 대표가 공언한대로 엄정 징계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라면서 민주당을 향해서도 "탈당 징계에도 버젓이 당적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자당 의원들을 모른 척하면서 국민의힘을 비판할 때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다만 1일 윤 의원이 의원 사무실을 정리했고 여야 지도부가 공히 사퇴안 공동 처리 가능성에 힘을 싣기 시작하면서 사퇴 처리의 물꼬는 트인 듯 보인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한 방송에서 사직안 처리와 관련, "최대한 빠른 시일 내 마무리해야 된다"며 "오는 27일 본회의가 열리면 표결로 처리할 생각이고 이 뜻을 민주당에 통지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사퇴를 선언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개인 물건 등 짐 정리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남윤호 기자 |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도 같은 방송에서 "(사퇴를)반대하거나 처리 자체를 반대할 사안이 아니고 야당이 요구하면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하면 하겠다는 소극적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다. 사직안 표결도 "의원들의 양식에 맡길 일"이라며 의원 개개인의 자유투표에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한 대목도 여운을 남긴다.
윤 의원의 사퇴 의사를 불러온 부친의 부동산 위법 의혹과 여당에서 제기하는 본인의 관련 여부에 대한 수사는 공수처이든 국수본이든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이뤄지면 된다. ‘셀프 수사’까지 의뢰한 이상 실체적 진실은 시간이 흐르면 밝혀질 것이다.
국민들은 거침없이 내던진 윤 의원 발 ‘의원직 사퇴와 대선 불출마 선언’의 종착지가 어딜지도 궁금해하고 있다. ‘정치 쇼’라는 비판도 있지만 윤 의원처럼 확실하게 책임을 지겠다는 정치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야 모두 내심 추구하는 바는 국민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지 한 정치인의 상당 부분의 발언이나 행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 따라 어떻게 작용하는냐에만 방점이 찍힌다. 이들은 항상 국민을 외치지만 각자 자기 집단의 정치적 유 불리부터 따져 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해왔다. 불행하게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윤 의원을 두둔하거나 그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일 의도도 없지만 여야가 사안을 보는 시각은 더욱 문제다. 그의 도덕성과 책임감, 정치관에도 전혀 관심조차 없다. 정치적 유·불리 계산에만 매몰되어 있다. 그는 여야 모두에게 이미 계륵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사퇴’를 들고 나온 그의 '제하분주'를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1타 쌍피’의 퍼포먼스로만 여긴다. 화투판 수준과 다를 바 없는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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