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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7>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이봉주와 라이벌? 글쎄요…" ②편
입력: 2011.06.30 14:15 / 수정: 2011.06.30 15:40

▶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올림픽 金 시절 언론 무관심에…①편

먼발치에 보이는 오륜기를 응시하던 황영조는 '바르셀로나의 영광'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말문을 이어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올림픽을 바라보고 준비해 왔던 순간을 떠올렸죠. 끝까지 해보자고 다짐했고요." 1992년 8월 9일 아침이 밝았다. 올림픽 폐회식 직전에 펼쳐진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 전 세계의 시선이 모아졌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황영조는 고질병인 족저근막염이 도져 발바닥의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꿈꿔 왔던 올림픽 무대에 모든 것을 걸었다.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및 국가대표 마라톤 감독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및 국가대표 마라톤 감독

◆ '바르셀로나의 영광' 손기정 선생에 금메달 바쳤을 때…

황영조는 김재룡(43), 김완기(41) 등 72개 국 112명의 선수들과 출발선에 섰다. 출발 총성이 울렸다. 5km를 지나자 발바닥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승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가 시작됐다. 30km 지점을 통과하면서 선두 그룹에는 황영조와 김완기 그리고 일본 마라톤의 최강자인 모리시타 고이치(42)만 남았다. 3km를 더 뛰자 김완기가 처졌다. 작은 한일전이 펼쳐진 것이다.

경기 당일은 공교롭게도 56년 전 손기정 옹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날이었다. "모리시타 선수는 스피드가 좋아요. 당시 그 선수가 일본의 모든 대회를 석권하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죠. 40km까지 계속 선두를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마지막 2.195km를 남겼는데 모두 힘이 빠졌거든요. 그 순간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다. 여기서 나가는 놈이 이긴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모리시타를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순간 마인드의 차이였어요."

▲황영조(왼쪽)와 모리시타 고이치
▲황영조(왼쪽)와 모리시타 고이치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강원 산골짜기에서 수없이 언덕길을 뛰어오른 시절이 연거푸 스쳐갔다. 모진 고생으로 아들을 키워 낸 어머니의 얼굴과 말 한마디가 가슴을 메웠다. 모리시타와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결국 황영조가 먼저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8만여 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황영조는 두 팔을 흔들었다.

▲최후의 승자는 황영조였다
▲최후의 승자는 황영조였다

"몬주익 스타디움에서 코너를 돌고나서 뒤를 살짝 쳐다봤어요. 모리시타가 저 멀리서 들어오고 있더라고요. 아, 이제 금메달이구나. 힘이 더 나더라고요. 손을 흔들었어요.(웃음)"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관중석에는 손기정 옹이 있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황영조는 금메달을 손기정 옹의 목에 걸어 드렸다. 가슴 뜨거운 장면이었다.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수고했다고. 가슴이 뭉클했고 더 뿌듯했죠"

▲결승선 통과 후 들것에 실려나가는 황영조
▲결승선 통과 후 들것에 실려나가는 황영조


▲고 정봉수(왼쪽) 감독과 고 손기정(오른쪽) 선생과 기념 사진
▲고 정봉수(왼쪽) 감독과 고 손기정(오른쪽) 선생과 기념 사진

◆ '보스턴의 영광', '히로시마 대첩'…파죽지세 황영조

'올림픽 챔피언' 황영조의 기세는 대단했다. 1994년 4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9초의 한국 최고기록을 다시 세웠다. 그해 10월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2시간11분13초로 '숙적' 일본을 또다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평화의 공원에서 금메달을 땄죠. 당시 남자 축구도 일본을 꺾으면서 한국의 분위기가 좋았어요.(웃음) 제가 쐐기를 박았죠. 사실 30km까지는 일본 선수들보다 100m 이상 떨어졌어요. 이후 승부수를 던졌는데 올림픽 때와 비슷하게 역전승을 거뒀죠."

일본 마라톤은 '황영조 징크스'에 시달렸다. 실제 황영조는 은퇴할 때까지 일본 선수들에게 져 본 적이 없다. 황영조에게 마라톤의 가능성을 심어 준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에서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도 일본은 은메달에 머물렀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거머쥐며 일본의 자존심을 완벽히 꺾었다. 대회 최우수선수(MVP)로도 선정돼 기쁨은 더했다.

▲황영조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까지 제패하며 승승장구했다.
▲황영조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까지 제패하며 승승장구했다.

승승장구한 황영조는 그러나 1996년 26살의 이른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내심 기대를 걸었지만 의외의 행보였다. "더 뛸 수는 있었지만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죠. 다른 동기부여를 찾고 싶었어요. 오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꿈을 이루고 싶었죠."

그렇게 황영조는 마라톤 현역 선수에서 물러났다. 이후 마라톤 감독, 방송 해설가, 사회 봉사단체 운영, 대학 교수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며 또 다른 도전을 택했다. "많은 분들은 황영조가 단순히 천재였기 때문에 금메달을 따 냈다고 보세요. 저는 노력형 선수였어요. 마라톤은 노력과 정신력 없이는 절대로 우승할 수 없어요. 정직한 운동이죠. 누구보다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냈거든요. 가끔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웃음)"

▲자신은 천재가 아닌 진정한 노력형 선수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천재가 아닌 진정한 '노력형 선수'였다고 말한다

◆ 이봉주와 라이벌 구도? 황영조와 1% 차이는…

자연스럽게 한국 마라톤의 양대 레전드인 이봉주 이야기를 꺼냈다. 동갑내기로 마라톤의 한 시대를 풍미한 두 사람은 전성기는 달랐지만 마라톤계 양대 산맥이자 레전드의 라이벌로 통하기도 한다. 단, 이봉주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아쉽게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 황영조와 1% 차이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음, 글쎄요.(웃음) 먼저 이봉주 선수는 제가 은퇴한 이후 한국 마라톤의 우수성을 세계에 더욱 알렸고요. 국민들에게 마라톤이라는 소재로 웃고 울렸던 좋은 선수였다고 생각해요. 비록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정신력이 조금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이)봉주의 인품과 마인드도 워낙 훌륭하지만 마라톤은 실전에서 정신력으로 1,2등이 가려지거든요."

▲한국 마라톤 전설의 양대 산맥 황영조(왼쪽)와 이봉주
▲한국 마라톤 전설의 양대 산맥 황영조(왼쪽)와 이봉주

넌지시 전성기의 기량을 놓고 두 사람이 맞대결을 벌였으면 어땠을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봉주에게 져 본적은 없어요.(웃음) 스피드도 제가 빨랐을 걸요?"라며 농담을 섞어 답변했으나 묘한 신경전도 느껴졌다. "제가 금메달을 따 낸 뒤를 이어서 봉주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을 따 냈기에 한국 마라톤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요즘에는 후배들이 그러한 영광을 이어가지 못해 아쉽죠.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마라톤은 헝그리 스포츠예요. 잘 먹었다고 해서 잘 뛰는 것도 아니죠. 케냐 선수들이 잘 먹어서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아니죠. 그곳에 다녀왔지만 그 선수들은 옥수수 가루가 주식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세계 마라톤을 주도하는 선수들이 저렇게 못 먹는데도 잘하는구나. 그만큼 마라톤으로 성공하는 것이 그들의 최고 꿈이에요. 우리 선수들이 옥수수 가루만 먹고 뛸 수 있을까요? 저나 봉주나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했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스포츠가 마라톤이라고 생각해요. 환경은 좋아졌지만 그에 걸맞게 책임감을 갖고 운동했으면 합니다."

▲황영조는 제2의 마라톤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황영조는 제2의 마라톤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대서양을 건너다 심한 풍랑을 만났다. 거친 파도에 배가 몹시 흔들렸는데 바다 위 풀잎 하나가 파도에 떠밀리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 다윈이 살펴본 결과 그 풀은 바다 속에 뿌리를 깊게 내려 박고 있었다. 삶의 뿌리를 깊게 박으면 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황영조는 한국 마라톤의 영웅이다. 은퇴 후 부침을 겪으면서도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현역 시절의 믿음은 온전했다. 대중들은 자신을 '천재'라고 치켜세웠지만 자신은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노력형 선수였으며 마라톤을 인생의 뿌리로 깊게 박은 채 살아왔다. 17년 전의 마음 그대로다. 가파른 몬주익 언덕을 넘을 때 강한 정신력과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있는 한국 마라톤이 써 내려 갈 제2의 전성기는 곧 새로운 역사로 귀결될 것이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 [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 여덟 번째 주인공은 '여자양궁의 전설' 김수녕 입니다.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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