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CT
[강기정 의원 인터뷰] "호남 386 리더…타고난 인파이터"
입력: 2010.02.04 13:33 / 수정: 2010.02.05 18:02

[장 민·박형남기자] 국회의원들 중에서 민주당 강기정 의원처럼 ‘만신창이’가 된 의원이 또 있을까. 국회 내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어느덧 선두에 서, 의장석으로 뛰어드는 강단을 보여주는가 하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졌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상처’도 많은 의원이다. 왼쪽 손에는 미디어 법 통과 저지, 오른손에는 예산안 통과 반대 시위를 하다가 입은 부상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런 강 의원의 행동에 지역구민들 역시 처음에는 “발목잡지 마세요”라는 말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싸우기는 싸우되 다치지 마세요”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민주당 동료의원들도 하나같이 ‘진정성이 느껴지는 의원’이라고 평한다.

"이의 있습니다!"로 화제 모았던 강 의원…"손가락이 아파 자리에 앉았다"

사진기자들도 덩덜아 바쁘다. 늘 그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는 것. 실제 지난해 12월31일 2010년 예산안 등을 김형오 의장이 일괄 상정했고, 김형오 의장이 이의 여부를 묻자 강 의원이 “이의 있습니다”를 외쳐 화제가 됐다. 그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위들이 플랜카드를 빼앗아 가는 것을 막으려다 손가락에 상처가 났어요. 손가락이 너무 아파 찬물로 담궈봐도 아픔이 가시지 않아 그냥 제자리에 있었죠. 그런데 김 의장이 예산안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이의있습니까?’라고 말하더군요. 대신 좌석에 가서 이의 있다고 과감히 손을 들었습니다.”

지난 대선 BBK 특검법 처리 당시 때에도 강 의원은 가장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제일 앞에 나와 있었다고. 머리를 움직여 고지를 빨리 점령하기보다는 몸이 전달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또 대학시절 5.18 민주항쟁 기념비 설립 문제를 놓고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싸우자 vs 빨리 뽑아서 연못에 빠뜨리자’라는 고민 속에서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행동했다. 즉 남들보다 빠른 판단력을 지녔다는 게 강 의원의 설명이다. 강 의원의 인터뷰는 그렇게 ‘싸움닭’에 대한 얘기로 시작됐다.

겁 많았던 학창 시절…"가출했다면 큰일 날 거라 생각, 일탈은 꿈도 못 꿔"

학창시절의 강 의원에 대한 궁금증을 꺼내놓았다. 범상치 않은 학창시절을 보냈을 듯한 강한 외모인데 ‘싸움닭’ 다운 김 의원도 그런 일탈을 감행했을까. “완전한 모범생이었어요. 전남 고흥 금산면에서 자랐는데 김을 만든 까닭에 집안이 풍족했어요. 때문에 가출할 이유도 없고, 가출을 결심해 본 적도 없어요.”

강 의원은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고흥 금산면은 ‘김 매기’로 유명한 섬이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그 당시 김 값이 비쌌던 탓에 ‘잘 사는 동네’였다. 강 의원은 그런 곳에서 자랐다. 때문에 강 의원은 안정된 집안에서 ‘내성적인 강기정’으로 자라났다. 이러한 섬 분위기는 초·중·고 내내 일탈보다는 학업에만 열중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담배를 피거나 미팅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일탈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게 강 의원의 설명이다.

이런 그의 성격 덕에 강 의원은 5.18 당시 전국 최초로 광주 대동고가 휴교령을 내리는 등 시대적 상황 탓에 어쩔 수 없이 학생운동에 참여했을 뿐 별 탈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말한다.

일·자식 욕심 많았던 어머니…"형들의 간섭, 단칼에 제압하기도"

대신 강 의원이 학창시절 간직하고 있는 것은 친구들과의 추억이 아닌 어머니와의 추억이다. 그가 ‘모범생’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어머니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강 의원의 어머니는 일과 자식 욕심이 강했다. 8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형들에게 ‘기계공고→세무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형들은 대학시절 시위에 가담한 강 의원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어머니는 형들과 달리 묵묵히 후견인 역할을 자임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아들이었던 탓일까.그는 어머니 얘기에 즐거운 모습이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자식들 중에 이름을 날리고, 성공할 만한 자식이 없다’라고 늘 강조셨어요. 나이차가 컸던 형들은 공무원이었거든요. 욕심이 많았던 어머니로선 형들의 '소시민적 생활'이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거죠.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형들이 '세무대 가서 공무원 하라'는 압력을 뿌리치고 전남대 공대를 진학했어요. 학교생활이 재미있었을 것 같았거든요.”

재미있을 것 같았던 대학생활은 단지 꿈에 불과했다. 강 의원에게 원초적인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시골 촌놈’에 불과했던 그는 외형적으로 사회를 알아갈 필요성을 느끼고 사회과학서클인 사회조사 연구회에 스스로 가입했다. 강 의원은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게다가 웅변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늦깎이 사춘기’가 온 셈이다.

'늦깎이 사춘기' 탓에 '반항심리' 키워…대학시절, 경찰서 ‘들락날락’

“제가 가입한 곳은 전남대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서클이었어요.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도 했고요. 그러나 제가 가입하자마자 서클 멤버였던 ‘박관현 열사’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됐어요. 박 열사 문제로 학교는 떠들썩했고, 별 준비도 없이 학생운동에 열중하게 됐죠.”

학생운동에 빠져든 강 의원은 ‘열혈 학생운동가’로 변신했다. 대학교 생활 내내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89년 이철규 의문사 사건과 관련해 전남대 병원 앞과 도청 등에서 열린 시위의 사회를 도맡기도 했다. 특히 민청련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 대학 4학년 시절 국가보안법, 집시법, 방화미수(화염병으로 최루탄을 던진 차에 불을 낼 뻔한 일)로 구속됐다.

“김민석 최고위원, 정태근·고진화 의원들과 함께 구속됐어요. 이들은 구형 10년에 5년 선고를 받았지만 저만 17년 구형에 8년 선고를 받았죠. 그 이유는 간단했어요. 같은 삼민투위 소속이었던 이들은 한 달 먼저 재판을 받았는데 이적단체 구성이라는 혐의가 없었어요. 반면, 저는 이적단체 구성이 들어가면서 이적단체 공소장 변경으로 인해 가장 많은 형을 받았죠. 때문에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때도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어요. 다행이 3년 7개월을 살다가 88년에 사면 받았죠.”

긴 교도소 생활로 '첫사랑' 아픔 겪어…3번째 만나 여성이 지금의 아내

3년 7개월의 교도소 생활은 강 의원을 강하게 단련하는 계기였다. 단식 투쟁은 물론 스스로에게 질문도 던지면서 자기반성을 많이 했던 것. “초기에는 책을 많이 봤는데 자본주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겁이 나더군요. 제 자신이 웃기기도 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제가 요란을 떤 것은 아닌가, 이 길이 옳은 길인가’라고 여러 차례 고민했죠. 그러다가 당당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강인해져야 된다는 결심을 했죠. 한마디로 교도소 생활을 통해 정신을 차렸어요.”

대신 첫 사랑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서클활동을 함께 했던 여대생과 1년간의 교제 끝에 이별통지서를 받았다. “구속된 지 6개월 만에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어요. 8년에 가까운 형량이라 여자친구로선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던 거죠.”

힘든 교도소 생활, 그리고 첫 사랑의 아픔을 이겨낸 그는 1988년 사면을 받은 뒤 대학에 복학, 1년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이후 5년 동안 교제한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적령기의 남자가 가져야 하는 사회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강 의원을 좋아할 부모님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강 의원은 집안의 반대로 인해 5년 동안 연애를 한 여성과 결혼 승낙의 문턱 앞에서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이별이 계속된 탓에 더 이상의 이성교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 “당시 아내는 전남대 총학생회 활동을 비롯해 노동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마음을 다 잡고 행정고시를 준비할 때 저를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곧 서로 교제를 시작하게 됐고, 아내 역시 저의 일을 묵묵히 지켜봐줬어요. 그러나 아내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학생운동 사건, 즉 당시 미제사건에 연루되면서 꿈은 산산조각 났어요. 다 저의 불찰이죠. 제가 전남대 축제 때 전통혼례를 치르려고 했거든요. 안기부에서 말리는데도 하겠다고 나서자 제 아내를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가 관련된 미해결 사건이 있었던 탓에 그만 아내가 구속됐죠. 참 미안합니다.”

사회 개혁 위해 21세기 청년 광장 설립…"청년그룹 정치 참여 권유"

그런 아픔을 겪었지만. 강 의원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 개혁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로에 대한 고민도 생겼다. 노동운동을 위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흐름을 전개하기 위해 청년세대를 조직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던 것. 결국 강 의원은 후자를 선택했다. 광주·전남 청년들을 규합시키고 조직화 작업을 통해 재야운동권, 이른바 청년운동그룹(새날청년회)을 조직했다. 대학생 운동에서 벗어나 사회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게다가 청년그룹들이 정치에 참여하길 권유하기도 했다.

“광주에서 두 가지를 제기했어요. 민중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되는 것은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2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에 출마해야 된다는 거였죠. 이 선거에 대비하지는 않으면 힘들다는 취지였어요. 그래야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민주화가 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이른바 범민련 통일운동이었어요 통일운동의 변화가 필요했던 거죠.”

이를 계기로 강 의원은 인재 등용을 표방하면서 21세기 청년 광장을 만들었다. 정치 현장에서 뛰는 인재를 발굴해 ‘배후세력’으로 진두지휘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출마를 하려는 청년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는 게 강 의원의 전언이다. “‘가치도 없고, 나가서 무엇하냐’는 의견이 대다수였어요. 또 금전적인 문제를 비롯해 머리가 아프다는 의견도 많았죠. 돌멩이를 던지고 화끈하게 데모를 한바탕하면 된다는 심리였어요.”

출마자 없어, 출마 결심…"민주화운동 보상비 운운하며 형에게 1억원 빌려"

해체위기를 맞은 ‘21세기 청년 광장’. 강 의원의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놓인 탓에 중대 기로에 섰다. 그로서는 ‘중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거 출마를 결심했고, 강 의원은 그 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16대 선거 당시 박광태 의원이 있었던 광주 북구(갑)에 무소속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치를 무서워하고 운동권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제가 앞장을 섰던 거예요.”

그러나 그 과정은 정말 험난했다. 선거 등록 하루 전까지 주변의 만류가 너무도 심했다. 더욱이 선거를 치를 자금이 부족해, 수협 조합장이었던 셋째 형에게 손을 벌려야 할 처지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굳게 믿었던 셋째 형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었던 강 의원에게 선뜻 1억원의 돈을 빌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 의원은 학생운동 시절 연단에서 서며 쌓은 특유의 말재주로 셋째 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민주화운동 보상법 통과가 그를 살렸던 것. 강 의원은 셋째 형에게 “감옥에 살다 온 것을 계산하면 1억3천만원 정도를 받습니다”라고 설득, 1억여원의 돈을 빌렸다. 우여곡절 끝에 법정 선거비용을 마련해 선거를 치렀고 19.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선목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었던 강 의원에게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60여표 차로 기탁금 못 받은 사연…"떨어진 것보다 돈 못 받아 잠 설쳤다"

대신 ‘절반의 아픔’도 있었다. 0.3%, 60표 차이로 기탁금 6~8천만원을 받지 못한 것. 그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 듯 강 의원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환장하겠더라고요! 떨어져서 잠이 안오는 게 아니라 돈을 못 받아서 잠이 안오더군요.”

강 의원은 16대 총선에서 출마한 것으로 만족했고, 이후 좀 더 개혁적인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기를 내심 빌었다. 즉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또 2002년 박광태 의원이 광주시장 출마를 위해 지역구를 떠나면서 신진 인사 영입에 나섰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강 의원의 생각과는 달리 민주당 김상현 전 후보가 출마하자, 출마계획이 없었던 강 의원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처음 출마때와 마찬가지로 참담했다. 첫 출마와 별로 다르지 않는 18.1%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고배로 마셨다.

강 의원은 제도권 진출에 계속 실패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민주당과 무소속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 개혁적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속내를 홈페이지에 털어놨다. “그러던 차에 2002년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유시민 전 장관이 개혁당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유시민 전 장관과 개혁당을 만들어 가다가 당시 민주당을 탈당한 정동채 전 장관과 김태홍 전 의원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만들었고, 그런 과정을 거쳐 민주당 옷을 입었죠. 그때의 이력 때문인지 지금도 제가 개혁당 소속 의원인 줄 아는 사람이 많네요.(웃음)”

3번의 노크 끝에 17대 국회 입성…골리앗 이긴 다윗으로 유명세

그는 2004년 17대 선거에 다시 도전해 국회에 입성했다. 3차례의 도전 끝에 당시 7선을 노리던 민주당 김상현 전 의원을 누르고 광주 북구(갑)에 당선됐다. 당내에선 강 의원을 골리앗을 이긴 다윗으로 불렀고, 그로 인해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강 의원이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써 온 일기가 한몫했다. 99년부터 홈페이지를 단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는 강 의원은 이틀이 멀다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왔다. 특히 국회에 입성한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안이 법사위에 상정됐을 때 ‘국가보안법이 법사위에 상정되던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많은 이들로부터 ‘국회의원 강기정’이 누구인가를 톡톡히 알리는데 성공했다. 현재도 강 의원은 꾸준히 의정일기를 올리며 변함없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의정일기 뿐 아니라 독특한 지원유세도 빛을 발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연단에 섰던 경험을 살려, 남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특유의 ‘선거운동법’을 만들었던 것. 이른바 골리앗을 이긴 비법인 셈이다. 강 의원은 그 선거운동법을 만드는데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80년대 전남도청 앞에서 사회를 봤을 때 정말 흥분이 되더라고요. 혼신의 힘을 다해 사회를 본 터라 ‘목’은 하루도 편치 못했죠. 그런데 어느 날 목이 갈라지면서 목 수술을 받았어요. 선거 때 마이크를 짧게 잡으면서도 관심을 끄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을 했어요. 그 방법은 한명씩 찍는 것이었어요. ‘지나가는 버스 아저씨 손 한 번 흔들어달라’, ‘XXXX 택시기사 아저씨 고생하십니다’라고 말하면 경적이 울리는 등 바로 반응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언론악법 홍보 등 마이크를 잡을 때가 있으면 이 방법을 자주 써요.”

초선 같은 마음으로 의정활동…"여권 견해 위해 싸움닭 역할 '쭉~'"

강 의원은 지역구민들을 위해,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늘 고군분투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한 몸을 불사르며 특유의 ‘싸움닭’ 기질을 발휘, 잘못된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더 먼저 앞장서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 의원을 싸움닭으로만 보면 큰 오해다. 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거침 없는 발언 속에 인간적 풍모가 느껴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시원스런 모습이 술 한잔 하고 싶은 스타일이다.

정세균 대표 비서실장으로 당내 복잡한 역학구도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를 꼼꼼히 풀어낼 정도로 실무능력도 인정 받았다. 최근에는 지방선거 기획본부에서 지방선거 전반을 기획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실세' 중의 한명으로 손꼽힐 정도로 정치적 중량감도 더해가고 있다. 싸움닭 이미지를 벗고 재선 의원 다운 의정 활동의 노하우를 키우고 있다. 그 어느지역보다 정치적 열기가 강하면서도 최근 수년동안 '큰 인물'을 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광주에서 강 의원은 그런 기대에 부합하는 몇 안되는 기대주 중의 한명으로 보인다.

<사진=송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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