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CT
'금녀의 벽' 허무는 재벌 딸들, 후계구도에 영향 줄까?
입력: 2013.04.01 10:47 / 수정: 2013.04.01 11:18

국내 주요 재벌기업 딸들이 회사 지분 확보와 함께 경영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임세령 대상 상무,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이서현 제일기획·제일모직 부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국내 주요 재벌기업 딸들이 회사 지분 확보와 함께 경영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임세령 대상 상무,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이서현 제일기획·제일모직 부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더팩트|황준성ㆍ서재근 기자] 국내 재벌 기업들이 과거 아들을 통해 그룹을 승계ㆍ유지시키려는 의도가 강했지만, 최근 재벌가의 딸들이 회사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등 3ㆍ4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주요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후계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금녀의 벽' 옛말, 재벌가에도 ‘여풍’이 분다

우리나라의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지난 1980년 42%에서 지난해 49.9%로 증가했다. 반면, 남성은 같은 기간 76%에서 73%로 감소했다. 특히 지난 2010년부터 20대 여성의 고용률이 남성을 앞지르며 국내 경제에 '여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대기업의 여성 임원 발탁, 각종 고시에서 여성의 약진, 우리나라 최초 여성 대통령 선출 등으로 이어졌다.

남성 중심 사상이 강한 재벌가에도 '여풍'이 불고 있다. 올 초 금호가에서는 ‘남자에게만 상속한다’는 관례가 깨졌다. 그동안 금호가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공동경영합의를 통해 ‘남자에게만 상속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차녀 박주형 씨는 금호그룹 68년 역사상 처음으로 회사 주식을 사면서 지분을 최초로 보유한 금호가의 여성이 됐다. 딸들의 지분 보유를 허용하지 않았던 선대 회장과 달리, 능력 있는 여성 인재 등용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온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경영철학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박주형 씨는 지난 5일 금호석유화학 1700주(0.01%)를 추가로 장내매수 했다.

국내 주요 그룹 총수 딸들 지분율.
국내 주요 그룹 총수 딸들 지분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딸들의 역량을 아들과 같이 발휘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양호 회장은 슬하에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과 장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를 뒀다. 아들이 있음에도 조양호 회장은 다른 재벌기업과 달리 지분을 조원태 부사장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CEO스코어가 국내 20대 재벌기업들의 자녀 지분 승계율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조원태 부사장의 지분 승계율은 34.3%로 1/3의 수준이다. 국내 20대 재벌기업의 아들 승계율이 평균 66.4%인 것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다.

게다가 경영에서도 조현아 부사장과 조현민 상무는 조원태 부사장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호텔부문은 조현아 부사장이 도맡아서 하고 있고, 계열사 진에어의 경우에는 조현민 상무를 주축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실적도 높다. 재계에서는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조원태 부사장이 물려받겠지만, 칼호텔과 진에어 등 알짜배기 계열사들은 딸들이 가져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딸만 둔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도 전문경영인, 사위경영보다 딸들을 주축으로 회사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임창욱 회장은 이번 승진인사 명단에 장녀 임세령 대상 상무를 포함시켰고, 지난해 영국 유학을 마친 차녀 임상민 대상 전략기획본부 부본부장을 경영에 복귀시켰다.

이에 임세령 상무는 대상 식품사업분야의 전반을 담당하는 식품사업총괄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상무)라는 직책으로 식품 부문 브랜드 매니지먼트, 기획, 마케팅, 디자인 등을 총괄한다. 임상민 부본부장은 그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신사업 발굴과 글로벌 프로젝트에 주력한다. 전략기획본부는 임상민 부본부장의 업무 복귀에 따라 기존의 기획관리본부 산하 전략기획팀을 강화해 본부로 승격한 신설 조직이다.

뿐만 아니라 임세령 상무와 임상민 부본부장은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대상홀딩스의 지분을 각각 37.42%, 19.90%를 보유하며 임창욱 회장(2.89%)과 어머니 박현주 대상홀딩스 부회장(3.78%)보다 앞서고 있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장녀인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의 두 딸인 박혜성, 박혜정 씨를 계열사에 입사시켜 경영수업을 받도록 했다. 박혜성 씨는 3세 가운데 가장 먼저 농심그룹에 입사했을 뿐만 아니라, 20대 중반부터 계열사의 등기이사에 올라 가장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의 딸 김윤지 씨도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김윤지 씨는 현재 그룹 계열사인 유아용품업체 제로투세븐에 대리로 입사해 실무경험을 쌓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현재 아들 이선호 씨와 딸 이경후 씨에게 각각 2000억원 수준의 비슷한 자산 승계를 했다.

국내 주요 그룹 총수 딸들 지분율.
국내 주요 그룹 총수 딸들 지분율.

◆ 재계 '여풍' 불러일으킨 범 삼성가 범 현대가

국내 재계 순위 1, 2위를 다투는 범 삼성가와 범 현대가에서는 딸들의 경영참여가 다른 재벌기업에 비해 비교적 활발하다. 특히 백화점ㆍ명품 수입 등의 유통업을 비롯해 호텔 등의 서비스업, 패션업, 광고업 등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보다 더 발휘될 수 있는 부문에 딸들의 경영 참여를 시도했다. 비록 쉽게 실적을 낼 수 있는 분야에 딸에게 경영을 맡겼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들의 높은 실적은 다른 재벌가의 딸들을 ‘유리 벽’을 뚫고 나오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지난 2001년 9월 호텔신라 기획부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해 현재 CEO까지 올랐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막내 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지난 1996년 조선호텔 등기이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호텔 경영에 참여,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막내 딸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도 드러나지 않게 그룹의 계열사의 호텔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오남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역시 지난해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을 인수했다.

이에 현정은 회장의 장녀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가 앞으로 호텔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정지이 전무는 현재 현정은 회장을 보필하며 계열사 현대유엔아이에서 경영수업 중이다.

이건희 회장의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패션업에서 가장 성공한 재벌가의 딸로 꼽힌다. 미국 명문 파슨스디자인대학을 나온 것을 무기로 패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난 2008년부터 이세이미야케, 띠어리, 토리버치 등 국외 고급 브랜드를 수입해 국내 패션 시장을 넓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촌 지간인 정유경 부사장도 국외 명품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세계인터내셔널을 통해 코치, 조르지오아르마니, 돌체앤가바나 등의 명품 브랜드를 수입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패션 브랜드 ‘톰보이’도 인수하면서 명품과 패션 분야의 사업을 확장했다.

또한 이서현 부사장은 광고시장에서 정몽구 회장의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과 라이벌 구도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 광고업 1위 제일기획은 지난 2011년 약 72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지난해 세계 최대 광고행사인 프랑스 칸 국제광고제에서 금상 3개, 은상 4개, 동상 5개 등 모두 12개의 본상을 수상하며 ‘광고 한류’를 일으켰다. 또 스파익스 아시아에 이어 애드페스트에서도 최다 수상을 기록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광고제를 휩쓸었다.

국내 광고업 2위인 이노션은 제일기획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가고 있다. 지난 2005년 설립 이후 5년 만인 2010년 제일기획과 2000억원 차이인 약 2조7000억원의 취급액을 기록했다. 물론, 이노션은 전문경영인 체제지만, 설립 이후 정성이 고문은 계속 직급을 유지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재벌가에 딸들이 지분 확보뿐만 아니라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며 “장남 또는 아들로 경영권이 어이지는 후계구도에 딸들이 가세하면서 앞으로 경영권 승계가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재벌 기업들도 아들 후계구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며 “아들을 고집하지 말고 전문 경영인, 딸 등 다양하고 능력 있는 인물에게 회사 경영을 맡겨야 더욱 치열해지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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